백러시아에서(10월)
어느덧 시월 말로 향하는 지금, 남아 있는 가을 정취를 새로이 음미하곤 합니다.
가지마다 단풍든 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고, 이제는 가지들이 하늘을 배경으로 앙상한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전엔 사라지는 단풍들이 그저 아쉽기만 했는데, 요즘은 그 자리를 통해 여백의 공간을 새로이 품게 됩니다.
이 여백의 공간을 참된 여유라 부르면 어떨까 싶어요.
이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이 세월과 함께 신속히 지나간 그 자리에, 이 여백의 공간이 변함없는 담백함으로 펼쳐진 게 새롭게 보이곤 합니다.
알고 보면 이러한 여백의 공간이 온갖 생명을 참으로 살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보이는 것보다도 보이지 않는 것에 더 주목하기를 배운다면, 이 복잡하고 분주한 세상에 참된 여유를 재발견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 9월, 이곳의 날씨는 마치 초겨울처럼 쌀쌀했는데 요즘은 햇살도 바람도 따사로운 나날입니다.
이제는 다양한 강의에 따라 듣고 쓰기에 익숙해져 가고 있고,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도 즐거운 교제를 나누곤 합니다.
지난 주에는 저의 생일이 있었습니다.
토요일이었는데 그 날도 수업이 있었습니다.
첫 수업을 마치고 따사로운 햇살이 좋아 잠시 공원길을 걷다 강의실에 들어섰는데, 이 친구들이 저를 위해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해 놓고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생일축하 노래를 어떤 친구들은 우리말로 불러 주기도 했구요.
어린 나이에 타국 생활을 하는데도 이처럼 마음은 따뜻한 친구들입니다.
그 가운데 한 친구는 한국에 대해 유난히 애착이 깊습니다.
지난 봄, 처음 이 친구를 보았을 때, 한국말을 가르쳐달라기에 그럴만한 여유도 없고 제 역할도 아닌듯 싶어 거절을 했었는데, 한국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보통이 아니어서 지난 주부터 일주일에 한 번 씩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처음엔 드라마나 인기스타들로 인한 환상적인 동경이리라 생각했는데, 역사나 인물 등 인터넷을 통해 나름대로 한국을 꾸준히 공부해왔더군요.
‘언젠가 꼭 한국을 직접 가 보리라.’고 이 친구는 말하곤 합니다.
제가 거주하는 집에는 조카와도 같은 어린 두 친구가 있습니다.
한 친구는 일곱 살배기이고 한 친구는 네 살배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들은 마리아씨의 증손녀입니다.
저를 위한 이 친구들의 소중한 하루일과가 있는데, 그것은 제가 학교를 파하고 오후 늦게 집에 돌아오면 저녁 식사를 위해 2층에 거주하는 저를 부르러 오는 것이지요.
만일 제가 스스로 주방에 내려간다면 자기네들이 부르지 않았다 하여 다시 2층 방에서 이 친구들을 기다려야 하지요.
그러면 이 친구들은 제 방문을 노크하고 제가 대답하면 문을 열고 제 품에 안기곤 합니다.
어느덧 저 역시 이방인의 마음이나 시각이 아닌 이곳의 한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대학생활 역시 “러시아어 인문학”이라는 교두보를 통해 교제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당할 듯싶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런 분위기에 감사하고 있구요.
시월이면 다양한 인문학 행사가 있는데(대학의 명칭이 A. S 푸쉬킨 국립대학이듯), 저 역시 일원이 되어 행사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곤 합니다.
이곳 친구들은 그런 행사에 꽤나 적극적입니다.
많은 관객 앞에서 자신의 ‘끼’를 표현하는 데 대해 긴장하면서도 즐기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보면 지나 온 과정이 제 의지대로 된 것은 없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내일 일에 대해 조급해 하지 않고 다만 주께서 열어주시는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처한 환경은 점점 더 호의적으로 변화되리라 생각해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함께 해 주시는 모든 동역자님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함을 전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오후에,
황존하 드림
댓글0개